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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으신 선생님들 제가 아들 대신 가겠습니다..” 육군 15사단 최영오 일병 총기 난사 사건

1962년 7월 8일 12시 35분경 이야기는 15사단 대연병장에서 열린 위문공연에서 시작됩니다.

딱히 놀 거리도 없는 군대에서 간만에 위문 공연이 온 거야 부대원들은 박수 소리 지르고 신나 있었는데요. 공연의 열기는 굉장히 뜨거웠고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네 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15사단 대연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모두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그때 다시 세 발의 총소리가 더 울려 퍼집니다.

그날의 사건을 알려면 더 과거로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최영오 씨,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최영오 씨는 성실하게 공부하고 효자에다가 심지어 여자친구도 굉장히 똑똑하고 엘리트였습니다.

여자친구 이름은 이화여대 문과대학 장현숙 둘이 오래 만난 연인이었습니다.

한 2년 정도 연애를 하다가 최영호 씨가 군대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근데 또 최영호 씨는 단기 악보병이라서 군 생활을 남들 반밖에 안 해도 됐는데요. 이 당시 군 생활이 3년 정도 됐으니까 1년 6개월만 하면 바로 제대라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최영호 씨 인생에 걸림돌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근데 이 행복한 일상이 군대에 들어가면서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단기 악보병이 되게 좋아 보이는데 굉장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제도였습니다.

의무 복무하는 병사들 입장에서 나가는 날짜 그 하루하루에 엄청 예민한데요.

그런데 몇 달도 아니고 아예 복무 기간을 반으로 줄여주는 학보병 제도 애초에 흑수저 출신 병사들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제도였습니다.

근데 문제는 이런 잘못된 제도에 대한 불만을 제도를 만든 국가나 군 조직에 표출을 해야 하는데 이 당시에 그런 논리와 지성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 모든 분노를 학보병 제도로 입대한 대학생 병사들한테 쏟아내게 됩니다.

상황이 이런데 학보병 제도로 입대한 대학생 중에 톱클래스 서울대 학생 최영호 일병.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리면서도 군 생활을 이어나가던 최일병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최 일병의 여자친구였습니다.

최일병도 그런 평범한 병사였고 장현숙 양은 그런 최 일병이 죽을 만큼 힘든 이 상황 속에서 계속 살아나가야 할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 최 일병의 사랑이 짓밟히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최일병의 선임 정방신 병장과 고왕규 상병이 최일병의 편지 12통을 생활관에서 공개적으로 뜯어보고 개망신을 준 거죠.

최일병은 두 사람에게 화를 내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상병과 정병장의 건방지다는 말과 폭행뿐이었죠.

결국 참다 못한 최 일병은 중대장에게 소원 수리를 적는데요.

“고상병과 정병장이 제 개인 편지를 뜯어보며 조롱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적 편지를 뜯어보는 부조리를 확인해서 조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대장은 가혹행위 가해자를 불러 간단한 구두 경고만 주었고 이 어이 없는 조치는 오히려 고상병과 정병장에게 최일병을 더 괴롭히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 줬습니다.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은 채 소원수리를 적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최일병에 대한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죠.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곳 그리고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잘못이 없어도 맞았고 반항을 했더니 더 맞았고 정상적인 보고 절차를 거쳐서 지휘관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돌아온 곳은 적당히 넘어가자라는 식의 피상적인 구두 경고 정신을 차려본 최 일병은 어느새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최 일병은 결단을 내립니다.

이 꼬여버린 군 생활의 매듭을 자신의 손으로 풀어내기로 말이죠.

1962년 7월 8일 12시 35분경 15사단 사령부 대연병장 15사단 사령부 대연병장에는 위문 공연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렇게 환호하는 관중 속에 최영호 일병을 괴롭혔던 선임 2명 정방신 병장과 고항규 상병이 무대를 향해 서 있었습니다.

최일병은 중대막사로 돌아가 자신의 소총에 실탄 8발을 장전합니다.

네 발은 정병장 세 발은 고병장에게 쏠 것이었고 마지막 한 발이 박힐 곳은 모든 복수를 끝낸 자신의 가슴팍이었죠.

먼저 올린 네 발의 총성 병장 정방신 현장에서 즉사 갑작스런 총성에 모두가 놀라 도망치고 있을 때 최일병은 조용히 다음 표적을 향해 총을 겨눴습니다.

그리고 고한규 상병 또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죠.

최 일병은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로 탈을 기도했으나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60년대 당시에는 상관 사례는 사형밖에 법정형이 없었고 그래서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자 서울대학교 동문들은 최영호의 구명을 위해 구명 운동에 나서고 탄원서도 보냈는데요.

일반적인 살인이었다면 무기징역 같은 처벌을 받고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결국 2심과 3심에서 항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고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 3월 8일 그렇게 최일병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최 일병은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사람의 아픔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요.

최형우의 어머니 이숙자 씨는 사형이 집행된 후 아들의 시신 인수 확인서를 받고 한강뚝에 올라가 몸을 던져 아들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그녀의 집에서는 편지가 한 장 발견되었습니다.

“높으신 선생님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부디 아들만은 살려주세요.”

마지막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최용호 일병의 여자친구 장현숙 양 그녀는 자신 때문에 남자친구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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