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경기도 팔당 인근에 살던 한 할머니가 나물을 캐다가 흰색 병을 발견했습니다. 할머니는 직접 짠 참기름을 병에 담아 상인에게 1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 병을 주목한 건 당시 경성(지금의 서울)에 살던 일본인 골동품상이었습니다. 부인이 산 병이 조선백자임을 알아본 그는 다른 골동품상에게 이를 60원에 되팔았습니다.
참기름 병은 이후 여러 수집가의 손을 거쳐 1936년 열린 경매에서 당시 돈으로 1만4천580원에 낙찰됐습니다.
이는 기와집 15채에 해당하는 금액이자 조선백자로서는 역대 최고가입니다. 훗날 정해진 명칭은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97년 지정된 우리나라 국보입니다.
놀랍게도 이 ‘참기름병’을 낙찰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오늘날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1906~1962)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전형필은 부를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평생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긴 인물입니다.
전형필은 한국 전쟁 중 피난길에서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 안에 넣고 지켰으며 추사 김정희의 예서, 겸재 정선의 산수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등을 지켰습니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유물들을 평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포장하라고 협박했는데, 북한군의 선전으로 인해 경계가 다소 약해진 것과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적은 점들을 고려해서 문화재 포장을 지연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전형필은 모처에서 은신하면서 지냈고 전형필이 소장한 문화재들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최순우, 손재형 등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미 포장한 유물들도 이런저런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다시 꺼냈다 포장하기를 반복하고 문화재를 나무 궤짝에 담아야 한다며 궤짝이 제작되기까지 시간을 끌었다고 하며 심지어 어느날은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기 했습니다.
또한 허구한날 북한군에게 화이트 홀스 위스키와 우키요에, 춘화도를 주면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이를 들키고 말았으나 고작 3일만에 서울이 탈환되면서 북한군들은 결국 문화재를 챙기지 못한채 헐래벌떡 평양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다만 1.4후퇴 때는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소장품들을 놔둔 채 피난을 가야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적지 않은 유물들이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전형필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자 전형필 본인보다 먼저 소장품들이 부산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풀려서 골동품상에 팔리고 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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